지난 6월 9일부터 14일까지 인사아트센터 3층 G&J갤러리에서 개최된 김갑진 화가의 <만다라-BLUE>에서는 숨겨진 선들의 청색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느끼게 하는 39점의 작품이 첫 선을 보였다.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 <존재와 사색> 시절부터 색의 특이점으로 존재론을 논하고, 그윽한 현(玄)과 까마귀로 검정의 의미를 성찰하던 그는, 흐름(流)의 이치와 바위, 소나무, 산이라는 자연물에서도 사유의 의미를 찾은 작가이다. 그런 그가 지난 5월, 청색회 정기전 참여 후,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사색 중 하나인 만다라의 푸른 빛깔로 돌아왔다. 이는 거시공간인 우주 속의 모래 한 점과 같은 그의 미시적 겸양의 색으로, 시야 밖의 존재론과 우주론을 차분한 명상으로 사유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마치 달의 뒷면처럼, 보이지 않아도 중첩과 실체가 있는 푸른 존재
울트라마린블루는 바다흐샨 샤르샤흐에서 유래된 신의 광석이자 천국의 빛깔 아주르 혹은 라피스 라줄리로 파생되는 청금석의 푸른빛이다. 지대한 권력으로도 깊은 바다와 너른 밤하늘만큼은 손아귀에 쥘 수 없었기에 위정자들이 유난히 집착했던 이 색은, 역설적으로 동양철학의 추상적 내면수행이자 내려놓아야만 보이는 사색의 가장 명료한 경지인 ‘만다라’의 색이기도 하다. 본질과 정수를 소유한다는 의미의 ‘만다라’는 인간과 우주를 하나로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라는 명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빛과 선을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김갑진 화가는, 이 만다라의 사유로부터 가느단 빛의 날실과 씨실 사이에서 우주와의 합일을 모색하는 구도자적 작업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의 존재는 이 선 하나 이 모래알 하나..”로 운을 떼는 작가노트에서 그는 청(靑)으로 중첩된 현(玄)이라는 어둠을 바라보는, ‘존재’, ‘만다라’, ‘울트라마린블루’를 이번 전시의 세 가지 화두로 삼았다고 한다.
하늘과 바다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색이면서도 반대로 DNA를 복구불능으로 파괴하는 원소의 빛깔이기도 한 푸른색. 그 푸른 우주 안에서 작은 원자로 시작되어 하나의 개체가 된 인간이, 빛이 사라질 때 가려지는 달의 뒷면의 존재를 알아낸 것은 사유의 결과다. 따라서 어둠과 카오스를 직조해 만든 푸른 광활함 속에, 그는 평소 추구해 온 깊고 그윽한 세계로 다가가고자 작은 붓을 잘 벼려낸 칼날처럼 세워 캔버스 면에 수없이 긋는 행위로 무한의 영역을 유한으로 만들어 나갔다. 붓끝 하나의 흔적으로 존재의 근원을 찾아나간다는 작가적 행위로서, 선을 통한 이 불규칙적 피드백은 프랙탈을 반복하다 원에 수렴하거나 질서를 지향한다. 그리고 이 푸르게 구성된 공간은 우주의 본질이 가득한 원형 바퀴로 상징되는 만다라의 자아처럼, 작가가 설명하고자 하는 ‘본무자성(本無自性),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철학적 사유와 원리로 신비로운 파동을 일으키며 동적 질서를 찾아나간다.
현(玄)과 회(晦)의 그윽한 어둠, 모래알을 헤아리듯 구도의 자세를 거쳐 청으로
검정과 적색, 회색, 노란색을 누비며 어둠의 그윽함을 회화로 끄집어내고자 덧칠과 그라데이션을 다각도로 시도했던 그는 그럼에도 여전히 본질을 더욱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작법에 대한 갈망이 컸었다고 한다. 지금의 개념도 실은 2011년 <존재와 사색>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셈이지만, 그는 2013년 <침류>, 2015년 <회닉>을 거쳐 검정으로 채워진 공간에도 ‘흑’이 아닌 아득하고 그윽한 ‘현’이 있음을 강조해 왔다. 이처럼 존재론에 대한 견해를 꾸준히 회화 기법으로 표현해 온 김 화가는,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색채 공간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방법론을 거쳐, 마침내 우주와 바다를 닮은 청색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작품의 모티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위정자들의 소유욕과는 결을 달리하는 구도자적 자세로서, 인간도 우주처럼 원자의 세계로 연결되며 무한대로 이어지는 우주의 일부가 됨을 인지한 이들만의 깨달음이다. 보이지만 잡히지는 않는 시간의 무한성으로 이뤄진 이 시공초월적인 공간을 추구하고자, 그는 정교한 선을 그어 채우고, 덮기를 하루 10시간 이상 반복하며 몰입했다. 이 과정은 비움으로 채워가는 명상적 행위와 일맥상통하기에, 그는 이 반복되는 작업이 피로는커녕 시간의 흐름마저도 잊게 했다고 말한다. 울트라마린블루에 광년 급의 원근감을 더한 성과는 물론,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론에서도 우주의 작은 선에 불과한 인간군상으로서 만다라의 개념을 실천하며 몰입한 결과물을 설명해 냈다는 의의까지 얻어낸 셈이다.
유와 무의 상생처럼, 시간개념 너머 본질과 정수를 소유하는 만다라로
‘만다라 블루’의 새로운 모티브를 보여 준 이번 작품들에 대해, 권상호 평론가는 그가 값진 염료와 극락정토의 칠보 대우를 받은 울트라마린블루를 통해 “무수한 빛이 교차하며 파동이 발생하는 동적 우주질서로 표출시켰다”고 표현한다. 김 화가 또한 푸른색은 빛이나 물 혹은 둘이 합일된 공간을 상징하는 색으로, 자연에서 채취할 수 없어 보석을 갈아 만든 이 귀한 색의 속성 덕분에 근원에 가까운 성찰과 수행의 통로가 연결됐다고 한다. 그리고 추상적인 내세와 천국을 지향하는 종교와 달리 철학과 예술은 인간도 삼라만상의 현장에 공존함을 알려주어야 하기에, 선을 긋고 덮는 횟수와 굵기의 강약을 조절하며 묻혀 들어간 선들의 수심을 상대적으로 얕거나 한결 깊게끔 만들기도 했다.
또한 그는 현대개념미술의 형식을 빌려 유무상생의 이치와 모든 선이 덧입혀 연결된 원리라든지, 전 과정이 유화 붓으로 가늘게 긋는 수작업임을 관객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고자 촬영한 작업과정 영상이 전시장의 좋은 도슨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내성적인 성향이기에 대작에서도 주로 내면으로 들어가는 작업을 추구하는 김 화가지만, 그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한없이 팽창하는 우주가 그러하듯 물감으로 은유된 사물을 바탕으로 끝없이 근본을 탐구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인쇄된 이미지로는 담을 수 없을 만큼 한없이 깊은 붓터치의 푸른색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허무함보다는 우주의 만다라를 간접 체험하면서 선의 중첩으로 성취해간 작가적 성찰의 깊이도 느낄 수 있게 된다.